Saturday, December 19, 2015

응답 시리즈 중 1988의 <보라>라는 여성이 만들어내는 판타지에 관하여.






어제, 많이 기다리던- 응답하라를 봤다.
대중문화에 관한한 특히 깐깐한 (안목있는) 친구 녀석이 꼭 보라고 추천해 준 것도 있고 해서.

여리고 가늘었던 그녀, 시대를 풍미한 가수 강수지의 <보라빛 향기>가 테마곡으로 울려퍼지는 보라와 선우의 데이트 현장에 웃음 짓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보라빛 향기>는 어디까지인 걸까? 하고.

이 둘은 예쁘다.

고등학생의 선우는 자상하고 착하고 게다가 똑똑하기까지한 남자고, 보라는 그냥 예쁘다. 왜냐고? 선우가 그랬거든. 보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예쁘니까, 라고.

착하고, 똑똑하고, 예쁘고, 눈 밑에 있는 점도 예쁘다고. ㅎ
적어도 둘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는 선우의 관점으로, "보라는 예쁜걸로"
이 한 줄로 이 커플을 설명해 두는 것도 충분하겠지.
남녀 사이에 사상이든 정치색이든, 사실 크게 중요한 건 아닐테니까.


내가 보는 <보라>는 이랬다.
이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그녀의 성격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나는 그녀를 보게 된다.
하고 싶은 건 꼭 하고 마는, 직설적인 데모하는 서울대생 말고도 그녀를 아우를 수 있는 성격적 범주 하나는 꼭 있을 거라 생각되기 때문에. 굳이 갖다 붙이자면 자주적인 여성이고 장녀이고 자아정체성이 확고한 여성이지만, 문학적 표현으로 애매하게 정의하자면

막다른 골목안에 갇힌 여성, 이라고 해두자.

위의 장면은, 데모의 주동자 중 한명으로 경찰에게 잡혀가기전 장면 중 하나이다.
나서고, 도
망다니고, 숨다가, 그녀는 잡혔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녀는 잡혔고 (엄마를 보았고) 그리고....


그녀 역시 어른이 되었다.

엄마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내와 며느리가 된 것이다.
담배피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인 '아내'의 모습을 한 그녀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 것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응답 시리즈에서 절대 보여주지 않는 "남편을 찾은 그 후의 삶"은 판타지 밖의 삶이며 굳이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삶일 게다. 응답시리즈는 보통 거기서 곱디 고운 매듭을 짓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때로 지지고 볶고 싸우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




여기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라>라는 여성이 여성에게 주는 판타지에 대해서.


그녀는 명석하고 주체적이고 책임감 또한 강하며 그리고 예쁘다.
골목진 곳에서 도망다니다 잡힌 그 순간에도 (당연히 그것은 드라마속 중요한 요소라 할지라도) 얼굴에 흉터가 나고 대일밴드를 붙였을지언정, 그녀의 손은 말끔하고 깨끗하고 그리고 예뻤다. 왜 손에 주목하고 있었나? 그건 '행동적' 이상주의자였던 그녀 또한, 어리고 예쁜 먹물일 뿐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설령 그녀의 집안이 반지하에서 고생하고 있었다손 치더라도, 적어도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에서 근무를 하고 그녀는 힘들게 고생한 적,이 없다.

어제 신문에 "금수저"를 운운하며 자살을 한 서울대생의 죽음에 대해 기사가 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야 할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은 '의외인지 아닌지' 작은 적개심과 분노에 찬 댓글을 남기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니까, 더더 힘든 사람들이 봤을 때는 충분히 금수저인 혹은 은수저인(그런 레벨 나누는 건 여기서 별로 상관없는 얘기지만) 사람이 그런 말을 남기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것에 대해 각자 나름의 '자기보호본능'에 입각해 그런 감정이 분출되었을 거라고. 숱한 공격적인 댓글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보라가 갑자기 너무 갑자기 변해버렸기 때문에서다.
중년여성 <보라>라는 인물 속의 아니무스(여성 속의 남성)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우리들 속에 숨어있는 아니마(남성속의 여성성), 아니무스가 해방되는 순간 표출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계속 공부만 하던 서울대생 보라가 대학엘 가서 더 논리적이고 행동적이며 때로 공격적으로 "특화된"성격을 보이기 시작했다면 이것은 그녀가 사회적, 가족주의적 억압에서 일정부분 해방되었기 때문에? 라고 맘대로 판단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단지 사회적 흐름에 몸을 맡겼다고 봐야 하나?
그렇게 보기에 그녀는 너무도 주도적이고 또한 자기 결정력이 분명한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그녀가. 그랬던 그녀가 달라졌다.
중년으로 여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개인으로 보았을 때에 이상적인 균형을 맞추기엔 좋을 것이다. 그만큼 <보라>는 남성성이 강한 10대와 20대를 보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결혼과 동시에 우리내 여성들이 하게되는 선택인지, 아니면 강요받은 (때로 의무에 들어가는) 선택되어진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일정부분 행복해보인다.


자기의 삶의 끝이라고 생각해서, 자살을 하는 사람들과
현실의 벽에 쉴 공간 하나 만들어서 사는 사람들.
이 글을 적고 있는 나를 포함해서 '살아있는 자'인 우리는 후자에 속하겠지.

누구나 세상과 맞서 싸울 땐, 덩그러니 나 혼자만 남겨진 느낌을 받는 법.
싸울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자와 싸워나갈 방법을 찾는 자.


내 마음 속에 움틀거리는 보라빛을 다시 찾아가고 있는 나는,
<보라>가 잃어버린 보라빛 향기가 안쓰럽게 보였다.  
정녕 이건, '내' 가 안쓰러운 거다. ㅎㅎ

알면서도. 근본은 자아로부터 온 것임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나의 이 고민과 쓰라림을 '한국여성'이라는 범주로 확대, 재생산 시키고 싶다.
어줍잖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휴머니스트의 관점에서.

왜냐고?
사실 나는 곱고 예쁘게 나이먹은 <보라>가 완전히 행복해 보이지는 않거든. ㅋ
적당히 부유하고 꽤 예쁘고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있는 <보라>라는 캐릭터는, 그것만으로 행복하기엔 너무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20대를 보냈다. 누구나 완벽히 행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보라>가 언제 가장 행복할지, 나는 알 것만 같다.


이것이 내가 귀여워 죽겠는, 이 커플이 만들어간 무지개의 끝이라 한다면.
나는 그 찬란한 무지개를 안본걸로 하겠다.

빛과 물방울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현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잠시 접어두겠다.






                           2015년 12월19일 아침에. 쿠사마야요이의 작품을 다시 한번 찾아보다가.

     


    


 

Sunday, September 14, 2014

추수하지 않은 추석

벌써 3번째 만들어 온 양동이 쌀.
지식이 부족해 절반의 성공이었던 첫번째, 벌레 공격에 당했던 두번째, 그 이후로 세번째의 수확. 올해는 풍년이다. 몇달을 정성들여 물을 갈아 주고 바람을 통하게 하고 그리고 햇볕을 쪼이고.

수확 시기를 놓친 것도 아닌, 수확 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어져 버린,
단지 한순간의 기분만이 아니다.
어쩌면 내 욕망의 끝을 따라다니고 있는 이 방관자적인 태도는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떨어지는 낱알들을 며칠동안 방치해 두고 있는 나는
내 이런 태도가 궁금하다.

한국은 지금 추석이라 한다.
내가 주목한 <추추>란 단어의 두가지 뜻.

秋收 - 가을에 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일. 가을 걷이
秋水 - 가을철의 맑은 물. 번쩍거리는 칼을 비유한 말. 사람의 얼굴빛이 맑고 깨끗함을 비유한 말, 거울을 비유한 말. 맑은 눈매를 비유한 말


나는 추수하지 않았다. 秋水하지 못했기에 秋收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깝고 안타깝고, 그리고 덧없어서 오히려 주변에서 한탄을 한다.
정작 본인은 아무런 감각이 없을 만큼 평온하다.

기르고 있던 그 순간에 집중을 했던 것인지.
아니면 수확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지 않는 것인지.
한풀에 확 꺾여버린 모습이
처연하다.